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8점
김흥식 엮음/서해문집

얼마전 3/26일은 안중근 의사의 기일이었다. 2/14일 형을 언도받고 한달 열흘 남짓새 형장에서 30대의 짧은 삶을 마감하셨다. '단지'와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으로 저명한 민족의 대표 독립 운동가이지만, 그가 어떤 재판을 받아 '사형' 언도를 받았는지, 그가 부당히 복역했던 '뤼순'은 어디였는지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가, 재판정 기록을 쉽고 현실감 있게 설명한 책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책이 산정한 적정 독자층이 중고생인 것을 알았지만, 어쩌랴? 역사에 (특히 일제 강점기 근대사) 있어서는 내가 딱 그 수준인 것을. 

 

재판 기록을 읽으며, '일제'에 의해 빼앗긴 대부분의 권리, 그 중에서도 내 나라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물론 법이 만인에게 공정하다는 믿음 위에서. 요즘 이 믿음이 많이 무너지고 있지만)

 

안 의사의 국선 변호인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변호사는 일본법의 규제에 따라 변론을 맡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내세웠던 안 의사에 대한 변론은 (그들이 안 의사에 대해 어떤 감정이었는지와는 별개로) 그의 '식민지 국민' 지위에 근거한 면책 조항이나 그의 '법 무지'를 이유로 하는 감형을 주장하는데 그쳤다. 그에 반해 안 의사는 최종 변론에서 자신의 '동양평화론'에 기반한 의거 동기와 '전쟁 포로' 의 지위를 주장하였지만 재판정에 의해 배척당했다.

약 일주일간의 짧고 얕은 6번 심리와 그 끝에 '사형' 언도라는 큰 결정을 뒤로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기 위한 책 집필에 들어가는데, 책의 완성을 위한 형 집행 연기 마저 거절 당하는 사실에는 허탈하기 까지 했다.

 

더불어 안 의사와 그의 의거에 대해 참 무지했구나 생각되었다.

그와 더불어 거사를 준비한 동지가 3명 더 있다는 것과 그들의 이름이 각각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였다는 것과 이토가 만약 '하얼빈' 역이 아닌 '채가구' 역에서 내렸다면 내가 기억했을 첫 번째 이름은 '우덕순'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참 죄송하다. 나와 우리는 네 분 모두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것을 잊는다. 망각은 삶을 적당히 부드럽게 너무 모나지 않게 살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중요한 것들도 많이 잊는다. 최근에 와서 그런 생각이 더 커졌다. 단 10년 전, 5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잊고 산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읽어야 한다. 아픈 기억일수록 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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